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315의거기념일 뜻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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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1960년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유혈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일으킨 항거는 이후 4.19혁명으로 이어지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0년에는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어 매년 3월 15일을 3.15의거기념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3.15의거기념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3.15의거 발생 배경과 원인

315의거기념일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대대적인 부정선거로 진행되었습니다.

선거 전날인 14일 오후 5시, 마산 시민극장에서는 자유당 정책부위원장, 경찰서장, 마산시장 등이 모여 공직자들에게 부정선거 요령을 전달했습니다.

선거 당일 오전 7시부터 사전 4할 투표, 3인조·9인조 투표장 투입 등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되었습니다.

민주당 참관인들은 입회조차 거부당했고, 투표함에 이미 들어있던 사전 투표용지를 발견한 참관인들이 항의하다 경찰에 연행되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오전 10시 30분, 민주당 마산시당은 이러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선거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당시 마산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귀환민과 피난민이 대거 유입되어 인구의 40% 이상이 이주민으로 구성된 도시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 경제 침체로 15만 명의 인구 중 약 2만 명이 실업자였고, 도시 하층민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야당 소속이었던 국회의원 허윤수가 정경유착으로 자유당에 입당한 사건은 야당 성향이 강한 마산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습니다.

3.15의거의 전개 과정

315의거기념일

오후 2시경부터 민주당 마산시당 당사 앞에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민주당 창원을 지구당 선거부장 장복열이 앞장서 “3.15는 부정선거다”, “협잡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쳤고, 1500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합류했습니다.

오후 3시 40분경에는 도의원 정남규와 민주당원 30여 명이 시위대에 합류하며 수천 명 규모로 확대되었습니다.

시위대는 남성동 파출소, 서성동 어업조합 등을 돌며 평화적으로 행진했습니다. 오후 5시 투표가 완료된 후, 경찰의 강제 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위를 주도했던 민주당 간부 6명이 연행되었고, 5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남성동 파출소와 자유당 마산시당으로 달려가 투석전을 벌이며 경찰 및 반공청년단과 대치했습니다.

저녁 7시가 되자 시위 분위기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저녁 8시 이후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학생 1명이 쓰러졌습니다.

흥분한 군중은 남성동 파출소를 완전히 장악하고 사무 비품과 서류들을 파괴했습니다. 시위대는 1만 명 규모로 불어났고, 마산 시내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마산 시청 부근에서는 시위대를 향해 소방차가 물을 살포했고,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돌을 던지면서 소방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았습니다.

고압선 합선으로 마산 시내 일원이 정전되었고, 경찰은 실탄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날 밤 경찰의 발포로 김영호, 김효덕, 김영준, 김용실, 김삼웅, 전의규, 오성원 등 7명이 사망했고,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 김주열은 최루탄에 직격당해 사망했습니다.

밤 9시 30분경에는 북마산파출소가 시위대에 점령당한 뒤 전소되었습니다. 변절자로 지목된 허윤수 의원의 집은 완전히 파괴당했고, 일부 시민은 분뇨를 끼얹기도 했습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시위는 진정되었지만,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수십 명의 부상자와 수백 명의 체포자가 발생했습니다.

김주열 열사와 4.11 제2차 마산의거

315의거기념일

3월 15일 시위 중 행방불명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약 한 달 후인 4월 11일 오전 11시,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김주열은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 학생으로,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관통하여 즉사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 시신은 경찰의 잔혹성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습니다.

4월 11일 오후 5시부터 시민 3만여 명이 도립마산병원 앞에 운집하며 제2차 마산의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위대는 마산시청, 마산경찰서, 창원군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오후 8시 30분경 마산경찰서장의 짚차가 전소되었습니다. 경찰은 또다시 발포했고 2명이 추가로 사망했습니다.

4월 12일에는 마산 지역 전체 고등학교 학생 3000여 명과 시민 1만여 명이 시내 일원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4월 13일에는 해인대학교 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하면서 마산의 항거는 계속되었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 발견과 제2차 마산의거는 전국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경찰의 잔혹한 진압과 용공 조작 시도

경찰에 체포된 시민들은 남성동 파출소와 마산시청 지하실에 임시 구금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총대와 곤봉으로 구타당해 두개골이 터지거나 대퇴부가 부러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리 사이에 나무막대를 끼우고 무릎을 꿇린 채 발로 밟는 고문, 수갑을 채운 손을 줄로 묶어 당기며 구타하는 고문, 천장에 매달거나 달군 쇠로 정강이를 지지는 고문 등이 자행되었습니다. 10시간 이상 음식물을 지급하지 않고 배고픔을 호소하면 폭언과 함께 구타를 가했습니다.

정부와 경찰은 3.15의거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아가려 했습니다. 3월 16일 치안국은 연행된 인물 중 대남간첩으로 검거된 자가 있다며 “공산당에게 속지 않는다고 봅니까?”라는 취지의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3월 17일 치안국장은 사건이 공산당 수법과 유사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고, 자유당 마산시당에서는 군중 사이에서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른 사람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용공 조작 시도는 언론과 국회의 진상조사 과정에서 허위로 밝혀졌습니다. 3월 30일 대검찰청 차장검사는 검찰의 조사결과 3.15마산의거에 공산당이 배후 조종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6월 1일에는 마산경찰서장과 사찰계장의 지휘 아래 총탄에 쓰러진 시위대의 시신 안에 “이승만을 죽여라”, “인민공화국 만세” 등의 전단을 만들어 넣은 것이 드러났습니다.

3.15의거의 역사적 의의

315의거기념일

3.15의거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집단 발포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유혈 민주화운동입니다.

이날 시위에서 8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수백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 발견으로 촉발된 제2차 마산의거는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의거는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산에서 시작된 민주화의 불꽃은 전국으로 번져나가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냈습니다. 이후 3.15의거의 정신은 1979년 부마민주항쟁, 1987년 6월 항쟁 등 한국 민주화운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1993년 7월 5일 마산시는 조례로 3.15의거일을 시 기념일로 제정했고, 2003년 12월 26일에는 경상남도 조례로 도 기념일로 제정했습니다.

2010년 3월에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어 3.15의거기념일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매년 3월 15일에는 국립3.15민주묘지에서 정부 주관 기념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3.15의거기념일 관련 주요 장소

315의거기념일

창원시에는 3.15의거를 기념하는 여러 장소가 있습니다. 국립3.15민주묘지는 3.15의거와 4.19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민주 영령들이 안장된 곳으로, 매년 기념식이 개최됩니다.

마산 중앙부두에는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며, 이곳에서 1960년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최초로 발견되었습니다.

3.15의거기념탑은 마산 시내에 위치하여 항쟁의 역사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3.15의거 역사관은 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운영하며, 의거의 발생 배경과 전개 과정, 역사적 의의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고향인 남원시에는 2001년 김주열 열사 기념관이 건립되어 그의 삶과 희생을 기리고 있습니다.

3.15의거기념사업회는 의거의 정신을 계승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확산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기념식과 함께 학술대회,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역사 탐방 등을 운영하며 3.15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요약정리

구분내용
발생 일시1960년 3월 15일
발생 장소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
발생 원인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
전개 과정오후 2시 시위 시작 → 저녁 8시 이후 경찰 발포 → 8명 사망, 수십 명 부상
제2차 의거1960년 4월 11일 김주열 열사 시신 발견 후 3만 명 시위
희생자김주열, 김영호, 김효덕, 김영준 등 총 12명 사망, 다수 부상
경찰 만행실탄 발포, 참혹한 고문, 용공 조작 시도
역사적 의의대한민국 최초 유혈 민주화운동, 4.19혁명의 도화선
기념일 지정2010년 법정기념일 지정
기념 장소국립3.15민주묘지,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3.15의거기념탑 등

결론

3.15의거는 부정선거에 맞선 마산 시민과 학생들의 정의로운 항거였으며,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던 선열들의 희생은 4.19혁명으로 이어져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매년 3월 15일 3.15의거기념일을 맞아 우리는 민주주의가 결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희생과 헌신으로 지켜져 왔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됩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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